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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문학촌의 ‘김유정 생가’ 아니다
유병상, ‘그의 형 김유근이 몰락한 후 생활한 집이다’
유병상

사람이 태어난 집을 뜻하는 낱말 ‘생가(生家)’는 평범한 보통명사다. 하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소위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 집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생가’라고 하면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 곳을 가리키는 특별한 고유명사처럼 생각된다. 더욱이 생가의 주인공이 온 나라 사람들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라면 그 존재가치는 더욱 부상된다.

 

지난 3월 29일 김유정 선생의 84주기 추모제가 춘천 ‘김유정 문학촌(이하 문학촌)’에서 거행되었다. 기자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문학촌이 개관된 지 20년이 되지만 처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처음 생가를 본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으로 한참을 생가와 기념관을 무연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김유정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김유정 선생이 ‘천석꾼’ 지주의 아들임은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천석꾼’과 ‘문학촌’의 ‘생가’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곳을 다녀간 많은 사람들은 ‘천석꾼’이라는 사실보다는 ‘소설가’와 선생의 대표작인 「동백꽃」이나 「봄·봄」에 나오는 농촌 분위기를 연상하며 ‘생가’와 선생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1902∼30년대의 시골과 초가집에 대한 향수어린 공간을 만끽하며 문학촌 탐방의 의미를 부여했으리라. 그래서 아무도 천석꾼의 집이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으리라.

 

사람은 자기가 경험(독서든 실제 경험이든)한 범위 내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실제로 농촌에서 생활해 보고 농촌의 수많은 집에 대한 형태나 규모를 본 적이 없으니 ‘생가’를 자신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대로 작가의 이미지에 덧대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곡식을 담은 가마니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가마니에 담긴 곡식을 세는 숫자인 ‘천 석’이라는 의미가 실체적으로 잘 와 닿지 않는다.

 

▲ 춘천‘김유정 문학촌’의 김유정 생가     © 시티뉴스

 

이제 논리적인 계산을 해보며 집의 규모를 상상해보자. 천 석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집이라면 우선 천석의 곡식을 보관할 수 있는 ‘곳집(창고)’이 필요하다. 또, 그 정도 규모의 농사를 지으려면 소도 있어야 하고 농기구도 가지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대강만 떠올려 봐도 ‘쟁기, 써레, 삽, 괭이, 가래, 멍석, 낫, 지게’ 등등 많은 농기구를 간수할 곳집도 있어야 한다. 이외에 곡식을 담을 가마니, 둥구미, 삼태기 등도 세려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농촌의 가재도구다. 그런데 ‘생가’ 어딜 둘러봐도 이런 구조의 건물은 없다. 더욱이 많은 농토를 건사할 머슴들이 살았을 방은 또 어디에 있지?

 

생가의 부엌을 보면서는 소설 「떡」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려 보았다. “벜에는 으중이떼중이 동네게집은 얼추 모인셈이다. 고기국에 밥 마는 사람에 찰떡을 씹는사람! 이쪽에서 북어를 뜯으면 저기는 튀정하는 자식을 주먹으로 때려가며 누렁지를 혼자만 쩍쩍어린다.”(개정 증보판 『원본 김유정 전집』 전신재 편. 도서출판 강. 2012.) 비록 소설 속의 묘사이기는 하지만 작가가 살고 있는 집의 부엌을 생각하면서 소설에서 묘사했다고 생각된다,

 

농촌의 초가집이지만 ‘천석꾼’의 집이라면 농사도구와 그에 필요한 가재도구가 엄청나게 많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생가보다는 훨씬 컸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한 비록 1900년대 초라고 하더라도 ‘천석꾼’의 지주다. 거기다 청풍김씨로 조선왕조 18대 임금인 현종의 장인으로 ‘청풍부원군’에 봉해진 충익공(忠翼公) 김우명(金佑明)의 9대손인 양반 가문의 가옥이다.

 

김유정의 아버지 김춘식(金春植)은 1873년에 태어난 조선시대 사람이다. 그런 양반 지주의 집이 문학촌의 ‘생가’와 같은 규모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시대적 인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가집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큰 집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추론을 더 한다면 선생의 생가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다고 생각된다.

 

연보(위 책)를 찾아본다. 천석을 웃도는 지주였으며 서울의 진골(종로구 운니동)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춘천과 서울 양쪽에서 생활. 유정의 출생지가 춘천인지 서울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서울인 듯함. 1917년 아버지 돌아가심. 이후 형 유근(裕根)의 방탕한 생활로 재산이 탕진되기 시작함. 1923년 재동보통학교(서울) 4학년 졸업. 가세가 기울어 집을 줄여서 옮김. 1928년 형 유근은 가산을 탕진하고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감. 1929년 휘문고보 5학년 졸업. 1930년 연희(延禧)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보성(普成)전문학교 입학.

 

연보를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 유근의 방탕생활로 재산이 탕진되어 형이 춘천으로 내려온 해에 선생은 이미 성인이 되었다. 당시로 보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농촌의 가정은 지주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니까 태어났을 때와 대학을 입학하는 시기까지는 천석꾼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니 당연히 현재와 같은 규모의 ‘생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와 같은 ‘생가’로 복원된 연유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로 형 유근이 재산을 탕진하니 집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었고 유근의 자손들은 줄어든 초가집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니 ‘생가’를 복원할 때도 지금과 같이 복원했을 것이다. 연보에 나오는 ‘천석꾼 지주’라는 사실을 잘 살피지 않고 복원했거나 아니면 알고도 무시했을 수 있다.

 

중국 전한시대의 학자 유향의 『전국책』에 ‘어리석은 사람은 일이 성사된 뒤에도 그 연유를 모른다.(愚者闇於成事)’는 말이 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베풀고 어리석은 사람은 제약받는다.(知者作敎而愚者制焉)’고 했다.
  
문학촌이 개관한 지 20년이 되었다. 지금까지 문학촌을 탐방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김유정이라는 소설가의 작품 속에 표현된 이미지로 문학촌의 ‘생가’를 체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향수어린 김유정 ‘생가’의 분위기만 가슴 가득 느꼈을 것이며 아이들은 김유정의 문학적 체험활동으로 성과를 얻어 갔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유의미한 좋은 경험이리라. 하지만 나는 ‘생가’의 규모로 보나 가옥 배치의 형태로 보나 실체적 사실과 다르니 김유정의 생가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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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4/08 [16:19]  최종편집: ⓒ 시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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